공부/정치

동아사태

좋은나라 2008. 7. 18. 15:23
특별기고
"1975년 동아사태" TD>
 


31년 만에 치러진 동아일보사 앞 천막농성

지난 3월 17일(금)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자유 수호투쟁을 벌이다 권력과 야합한 동아일보사로부터 강제 축출된 지 3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부터 보름 동안 동아투위 위원들은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정부는 1975년 동아사태의 진상을 즉각 규명하라’
‘동아일보는 언론인 무더기 해직을 사죄하라’
대부분 30대에 해직돼 어느새 모두 60세를 넘긴 동아투위 위원들의 농성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동아투위는 31주년 성명서에서 ‘동아일보는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해야한다’고 밝히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길만이 한때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독차지하던 일류신문에서 삼류신문으로 전락한 동아일보가 사는 길임을 호소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 측에서는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정부와 정치권에도 각성을 촉구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자유언론을 온몸으로 지키려다 강제해직된 언론인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이며, 그 책무의 시작은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언론인 무더기 축출의 진실을 먼저 규명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동아 백지광고 사태의 전말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로써 수립된 유신체제는 온 사회를 철권으로 통치하려는 반민주적 억압체제였다. 박정희는 10월 유신과 더불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국민의 사고와 행동에 재갈을 물리고 이를 어기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10월 17일부터 그것을 해제한 12월 13일까지 언론사의 모든 기사를 계엄사령부의 사전검열을 받도록 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뿌리부터 잘랐다. 진실보도라는 언론의 기본적인 역할은 사라지고 독재정권의 확성기 노릇만 강요당했다.
중앙정보부원들이 매일 신문사에 드나들며 일일이 간섭을 했다. “학생데모 기사는 1단 이상 안된다. 야당 당수 기자회견은 사진을 싣지 말라. ‘연탄값 인상’이라고 쓰지 말고 ‘연탄값 현실화’라고 쓰라”는 등 지금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언론계에서 매일 벌어졌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이것도 신문이냐며 동아일보 화형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참다못한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유신독재의 폭압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동아일보 지면과 동아방송 전파를 통해 그동안 보도되지 않던 인권소식 등을 활발하게 보도했다. 동아일보사 젊은 언론인들의 결연한 자유언론 실천운동은 유신권력과 사주권력의 교란과 방해를 무릅쓰고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 속에 민주화운동을 분출시켰다. 예기치 않았던 사태에 놀란 유신독재 권력은 전대미문의 광고탄압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1974년 2월 16일부터 광고주들이 이유는 묻지 말라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도, 자유당 독재정권 아래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25일에는 신문광고가 완전히 끊겼고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탄압도 12월 20일부터 시작돼 이듬해 1월 11일에는 광고가 완전히 사라졌다.
동아일보는 광고 면이 하얗게 빈 신문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러자 삽시간에 백지 광고 면을 메우려는 ‘격려광고’ 성금들이 몰려들었다. 종교계와 학생, 민주시민들의 격려광고들이 광고 면을 가득 채웠다. 백지광고 지면은 민주시민들의 함성으로 메아리쳤고 민심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

독재권력과 언론의 야합, 언론인 무더기 축출

본격적인 광고탄압이 시작된 지 한달이 경과할 무렵부터 동아일보 안팎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사주 측이 곧 권력과 타협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우선 사주 측은 1975년 3월 8일 기구축소 해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 심의실 4개 부서 18명의 사원을 첫 대량학살의 제물로 삼았다. 그 즉시 동아일보 기자들과 동아방송의 방송인들은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사주 측은 3월 17일 새벽 3시경, 손에 몽둥이와 해머를 든 술에 취한 폭도 수 백 명을 동원, 부당해임에 항의하여 제작거부 농성 중인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150여 명의 사원들을 거리로 몰아냈다. 이때는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때였는데 수 백 명의 경찰들이 이들 폭도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선 언론인들을 내몰고 지면과 방송 내용이 변질되자 1975년 7월 16일 제약회사 광고를 시발로 슬그머니 광고가 정상화됐다.


사주 측의 인사조치는 해임 134명이었고 동아투위 위원으로 투쟁대열에 끝까지 함께한 숫자가 113명이다. 이들 가운데 안종필 2대 위원장을 비롯 12명의 동아투위 위원이 세상을 떠났다.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13명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대부분 동아투위 위원들이 미행, 감시, 취직 방해 등 갖은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이제는 밝히자! 동아사태의 진실을

군사독재시대를 마감하고 세 번째 민주정부가 들어섰는데도 민주화 투쟁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1975년의 동아사태는 여전히 흑막에 가려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야 그렇다 치고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와 언론인 무더기 축출에 대한 의혹은 하나도 풀리지 않고 있다. 아직도 자유언론을 압살하고 독재권력과 야합했던 언론권력이 민주정부의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꺾을 만큼 대단한 것일까.
신문 광고 면이 일거에 하얀 백지로 변하기까지 과연 어느 기관의 누가 어떻게 광고주들을 위협했는가.

 

서슬 푸른 유신 철권통치 하에서 온 몸을 던져 자유언론수호투쟁에 나섰던 130여 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길거리로 내모는데 권력과 동아 사주는 어떤 야합이 있었는지 이제는 밝혀야 한다.
지금 한국의 수구언론들은 힘겨운 민주화 투쟁으로 얻어진 언론자유를 악용하여 오히려 민주개혁의 발목을 잡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훼방 놓고 있다. 이들 언론 매체에는 사주의 언론자유, 기득권 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자유만이 있을 뿐 기자들을 비롯한 언론 종사자들의 언론자유는 거부되고 있다. 용기 있는 언론인들이 무더기로 축출당한 동아사태 이후 이들 언론사주들의 횡포를 감히 견제할 건강한 집단이 아직 우리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사태의 진상규명과 동아투위 위원들의 원상회복은 왜곡된 언론계 풍토를 바로 잡고 무기력해진 현역 언론인들을 각성시키는 일대 기폭제가 될 것이다. 동아사태의 해결이야말로 언론개혁의 첫 걸음이요 전제조건이다. 이번 기회에 언론과거사 진상규명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1975년 동아사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정동익
전 동아일보 기자, 월간 『말』 발행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4월혁명회 공동의장.
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