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페르시아 다섯번째 왕/아하수에로
성경:에스라 4장6절(에스더1·2·3장)
아하수에로는 「위대하다」는 뜻이다.아하수에로는 바사의 5번째 왕으로 큰 번영과 영화를 누린 왕이다.
다리오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지역행정단위가 1백23도인데 비해 아하수에로왕때는 1백27도인 것을 보면 그 시대의 국력을 짐작할만하다.아하수에로왕은 역사적으로 헬라식 표현인 크세르크세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아하수에로왕은 인도 부근에서 구스와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하수에로왕은 정치적인 능력이나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반면에 자기를 과시하고 연락을 즐기는 사람이었다.그가 통치하던 수산궁은 솔로몬왕의 궁전과 비슷할만큼 호화스러웠다.또한 그의 신하와 각도의 방백과 중신을 모아 1백80일간 잔치를 베푼 것을 보면 그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다.아하수에로왕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에스더가 그의 왕후가 된 사건이다.
아하수에로왕은 한 제국의 신하와 방백들 앞에 자기의 첫부인 와스디의 미모를 자랑하고 싶어 그녀를 계속 불러냈다.그러나 와스디는 이 일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거절하였다.이로 인해 와스디가 폐위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행운을 입게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볼때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운 것이었다.아하수에로왕은 자기의 체면을 깎은 와스디 대신 에스더를 선발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고대의 바사어로 Khshaya rsha (위대한 사람, Mighty man)라고 부른 바사 왕인데, 일반적으로는 헬라역의 크세르크세스(Eevrzh", Xerxes, 재위 BC 485- 465)라는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오 휴스타스피스(Darius Hystaspis, BC 521 485)와 고레스의 딸 아트사의 아들이다. 에스더의 남편(에 1:2,19,2:16,17)이며, 에스더서의 주요 인물이다(에 1:1,2,9,10,16,2:21,3:12, 8:7, 10 등). 에스더서는 그의 호색˙변덕˙무사려˙전제˙잔학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희랍 역사가의 서술과 일치한다(헤로도터스). 또 수도 수산과 인도에서 에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판도도 나카시 루스템에 있는 다리오의 비문과 일치한다.
즉위 후 2년에 애굽을 평정하고, 4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대군을 거느리고 헬라 침략을 시도했으나 살라미 해전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 후위 장군(後衛將軍) 마르도니오스도 대패 하므로써 침략을 단념했다. 후에 두 신복에게 피살되고 아들 아닥사스다 1세(롱기마누스)가 왕위를 이었다. 사마리아인이 귀국한 유다 백성을 고소한 것은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아하수에로 왕의 부조 아하수에로 왕의 무덤 그의 치세때의 일이며,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BC 529-522)의 때는 아니라고 한다. 에스라 4:6에는 아하수에로스로 되어 있다. 에스더서의 대향연은 500만 대군을 거느리고 헬라 정복(BC 580년)을 꾀하다가 대패한 아하수에로 왕인데, 이 때는 그 원정을 위한 준비 향연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판도는 바사동경(東境) 인더스 강 유역 일대서부터 에디오피아 북부 나일 강 상류 리비아 지방에 걸친 127개 도에 이르렀다. BC 483년에 있었던 이 잔치는 어떤 학자는 헬라 원정에 대한 사기 앙양과 전국 중신 회의라고 한다. 그는 만조 백관을 전부 초청하여 180일 간이나 잔치를 계속하여 자국의 부강을 과시하는 동시에, 적에 대한 필승을 꾀함인 듯하다. 제 7일인 폐회일에 왕은 주흥에 취하여 왕후의 미모를 문무 백관 앞에서 자랑하려고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 앞에 나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이에 불응함으로써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굴 수 있는 대 군주가 중인의 환시하(還視下)에 모욕을 당해 그는 대노하였다. 왕은 왕정 고문관 격인 7인의 방백에게 왕명을 거슬린 왕후의 법적 처리를 물었다. 그들은 왕후의 덕망이 일반 국민에게 호감이 없으며, 일반 국민이 이것을 본받아 남편에게 불순종한다는 이유를 들어 폐비하고 새로운 왕비를 맞으라고 제의했다. 왕은 그들의 제안을 승락하고 모든 도에 조서를 내려 남편으로 하여금 그 집을 주관케 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 선발에 착수했다. 이때 많은 왕비 응모자 중에서 에스더가 선택되었다. BC 479년 와스디를 대신하여 에스더를 왕후로 삼은후에 왕은 그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각 도의 세금을 면제하고 상을 내렸다. 이때는 헬라 원정에서 패전하고 돌아온 지 1년 후이다. 총리대신 하만이 에스더의 사촌오빠 모르드개에 대한 사감으로 인해 유대인 전멸 계획을 세우고 왕에게 무고하고 동시에 은 1만 달란트(당시 세입의 3분지 2에 해당)를 국고에 넣겠다고 해서인지 왕은 이를 허락하고 하만에게 맡겼다. 왕은 전국에 조서를 내려 BC 474년 12월(아달월) 13일 하루 동안에 유대인 전부를 학살하고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물론이거니와 온 유대인은 금식 기도로 하나님께 이 위급을 호소했다. 에스더는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왕과 하만을 초대했다. 마침 그때 왕이 잠이 안 와서 역대 일기를 보다가 왕의 암살에 대한 모르드개의 기사를 보았다. 왕은 모르드개 때문에 구명된 것을 알고 그의 공이 큰 것과, 논공행상이 안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왕은 하만을불러 존귀케 할 자의 논공행상을 물어 그의 의견을 좇아 왕은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면류관을 씌우고, 말을 태워 하만으로 하여금 온 성안을 돌면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르드개를 총리대신에 앉히우고,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민족구원의 결단으로 왕의 마음을 움직여 하만은 그가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던 50규빗 되는 장대에 달아 죽이게 했다. 그리고 온 유대인의 학살 계획은 왕명으로 공포되어 이를 취소할 수 없으니 유대인으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자위권을 발동하여 적에게 대항하여 살해와 재산 탈취권마저 허락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유대인은 전멸의 위기를 모면하고 이날(아달월 14, 15일)을 부림절로 정하고 연년이 기념하여 지키게 되었다(에 1장,2장,3:7-15,6:1-11, 7:5-10, 8: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