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성경공부

[스크랩] 토마스 선교사, 27살의 순교, 그리고 역사는 흐른다.

좋은나라 2009. 7. 25. 22:41

토마스 선교사(1840-1866)

 

 

 

영국 웨일즈 출신으로 27세떄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다. 

토마스는 여전히 영국에서도 소외된 존재이다.

그는 런던선교회 출신으로 파송되었지만 아내를 잃은 후 선교회를 탈퇴하고 조선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때 토마스의 나이 26살, 다음은 그가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

 

"영국을 떠날때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것이 될 줄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글을 써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선교지 상해에서 처음 보내는 선교 보고서가 아내의 죽음이라니 ...

그 비통함 그것을 적어내려가는 26세의 젊은 선교사. 그 마음을 누가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

토마스가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왔을때 그의 아내는 혼자 유산을 한 채 피를 쏟고

쓰러져 죽어 있었다.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른 토마스의 황막한 비통

그 설명하기 조차 힘든 슬픔과 상실감을 쏟아내기 위해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참수를 당한다는 위험과 고통의 땅 조선을 찾아 자신을 내던진다.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가에 올라왔다.

외세를 배격하던 군인들에의 셔먼호는 불타고 동승했던 토마스는 성경을 목이 잘리기전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뿌린다.

아직도 순교냐 아니냐로 논쟁이 있는 그 죽음은 실패한 선교사의 전형적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토마스가 처참하게 대동강가에서 죽어간지 27년이 되던 1893년 마펫,그레함리,스왈른 리

등 세사람이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 중에 사무엘 마펫과 조사(전도사) 한석진이 우연히 최치량이라는 사람의 주막에 들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치량은 토마스가 목베임을 당할때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나이 12세때, 그는 숙부와 함께 당시 평양을 떠들썩하게 만든 제너럴 셔먼호를 구경하러

갔다가 어떤 서양인이 강둑으로 기어올라 많은 책을 뿌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토마스가 뿌린 성경을 주워 갔고 최치량도 남몰래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아버지는 위험한 천주교도들의 책이니 갖다 버리라고 하였다.

하도 많이 뿌렸기 때문에 평양감영에서는 그것을 한곳에 모으라고 했다.

그 책임자는 평양성 동문을 지키던 관리 박영식 이었다.

겁을 먹을 최치량은 그 책을 박영식에게 가져다주었다.

박영식은 나중에 자기집을 지을때 수거했던 성경을 찢어 벽지로 발랐다.   

 

세월이 흐른후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구입해 주막을 열었고 바로 그 주막에 선교사들이

들르게 된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벽에 도배된 벽지가 한문성경이었다

너무나 놀란 그들이 주인 최치량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물으니 토마스가 목베임을 당할때

던져준 그 성경책임이 드러났다.

 

그때까지도 토마스의 순교는 그리 알려지거나 평가되지 못했다. 

그러나 복음을 온전하게 한번 전하지도 못하고 성경을 뿌리다가 목이잘려 죽은 그 허무한

27세의 청년의 죽음을 하나님은 결코 모른체 하지 않으셨다. 

 

영문도 모르고 그 집에 살던 최치량은 그 서양인이 토마스임을 알게되고

두 사람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다.

성령의 감동으로 최치량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1894년 1월 마펫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평양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고 한석진조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는 고통을 격었으며

나중에 장대현 교회 설립의 공헌자가 되었다. 

 

그 즈음 어느 날

한 노인이 한 노인이 마펫선교사를 찾아왔다.

그는 울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30여년전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이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 호 사건당시 제대한 군졸이었는데 옛 상관이었던 이현익이 제너럴 셔면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밤중에 몰래 셔먼호 안으로 들어가 이현익을 구출해 냈다.

박춘권은 셔먼호에 불을 붙이고  불붙은 배에서 도망쳐 뭍으로 올라온 토마스를 붙잡았고 

결국 대동강가에서 직접 목을 베었다. 

 

당시 임금조차 칭찬하며 큰 공을 세웠지만 박춘권은 늘 근심이 가득하고 그 서양인이 죽기전에

자신에게 성경을 전해주던 장면이 자꾸 떠올랏다고 한다.

 

그런데 30여년이 흘러 자신의 집 근처에 서양인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것이 널다리골 교회(토마스의 던진 성경으로 도배가 된 최춘권의 집)이다 

주일마다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 박춘권은 자신이 죽인 서양인이 떠올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그 널다리골 교회가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의 집 근처에 세월질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 놀라운 사실을 마펫이 1899년 선교사 모임때 발표했다. 

박춘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어 평양의 부흥에 헌신하였다.

토마스를 죽인자까지 사랑하여 그 은혜안에 품으신 것이다.   

  

그들은 최치량이 경영하는 주막을 중심으로 선교터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집 한 채를 구입한다.

그러나 집주인이 외국인에게 집을 판 혐으로 체포되자 선교사들은 집을 물리고 평양을 떠나야 했다.

이때 관에서 동원한 평양군중들이 마펫일행에게 돌을 던지며 시위했는데 한 청년이 돌을 던져

마펫선교사의 턱뼈를 부러뜨린다.

놀라운것은 바로 이 청년이 평양대부흥의 시기인 1908년 한국인 최초로 제주 선교사가 된

능력의 전도자 이기풍이다.

 

이기풍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기풍아 기풍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앞으로 내 증인이 될 사람이다. 

마펫을 괴롭히고 깊은 번민에 빠져있다가 잠에 든 이기풍을 예수님이 부르신것이다.

이기풍은 회개의 눈물을 뿌리고 누구의 전도도 없이 홀로 예수님을 믿었다.   

 

현재 북한의 성경은 독자적인 번역이 아니라 한국의 공동번역성서의 '평양교정본'이다.

공동번역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북한의 어휘와 문법에 맞춰 바꾸었다.

북한땅에서 누가 공동번역을 수정 번역할 수 있었을까? 

2002년 7월 남북 교회지도자 모임에서 강영섭 조선그리스도연맹 위원장은 북한판 성경의

실무작업자를 공개했다. 

 

그는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수였던 이영태이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938년까지 우리말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이영태는 1926년 평양 숭실대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전도사가 되어 성경을 번역할때

서기로 큰 기여를 했던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이다. 

그가 살아남아 현재 북한에서 쓰이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영태의 번역은 북한의 언어로된  매우 가치있는 작업이다.

성령님께서 통일시대를 대비해 그 땅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놓으신것이다.

지금은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지만 성령님께서 그 흑암의 땅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심을 믿는다.

 

토마스의 나이 26세때 1865년 상해에서 아내를 잃고 조선으로 향한다.

그는 1866년 27세 대동강가에서 복음 한 번 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평양에서 살던 12살 소년 최치량은 서양인의 처형을 구경갔다가 3권의 성경책을 주워온다.

금서인 책이 무서워 수거책임을 맡았던 평양감영의 박영식에게 갔다주고 박영식은 훗날 자기집을

지으면서 성경을 찢어 도배를 했다.

 

어른이 된 최치량이 박영식의 집을 사서 주막을 연다. 

토마스가 죽은지 27년만에 마펫선교사 일행이 이 주막에 들르게 된다.

최치량은 복음을 듣게 되고 세례를 받았으며  훗날 박영식이 성경을 도배했고

최치량이 주막을 했던 그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된것이다.

 

그 널다리골 교회가 장대제 교회가 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가 된다. 

그리고 이 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1월14일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토마스가 성경을 뿌리며 순교한지 41년만이었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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