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힘, 아버지
늘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던 한분을 떠올려 본다. 항상 나의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셨던 분, 바로 나의 아버지를. 우리 이웃들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보자.
생선장수 아버지의 동그라미 그림편지 김경태
나 어릴적, 우리 아버지에게선 언제나 생선비린내가 났다. 아버지는 생선장수셨다. 팔다 남은 생선이 늘 올라오는 밥상도 싫었고, 글씨를 몰라 툭하면 자고 있는 나를 깨워 뭐든 읽어달라고 하시는 아버지도 정말 싫었다. 아버지는 혼자만 아는 그림으로 돈 계산을 하셨고, 그러다가 그 계산이 맞지 않는 날에는 밤새도록 그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며 날을 새기도 했다.
그렇게 창피하게 생각한 아버지가 벌어 온 돈으로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다기보다 아버지를 떠나 살게 된 것이 너무나 좋았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여기 이 봉투에다가 니가 있을 곳의 주소좀 써봐. 여따가 전부 다 써놓고 가야지 돼야. 내가 까막눈인 게 글씨를 못 쓰잖여. 니가 보구잡아도 답답해서 살수가 있것냐? 전화도 없잔여” 아버지는 족히 수십장은 되어 보이는 편지봉투를 내 앞으로 밀어놓으셨다. 나는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건성으로 주소를 써서 아버지께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췻 집 주인아주머니가 낯익은 편지봉투 한 장을 건넸다. 내 글씨였다. 나는 그제야 내 고향을 생각했고, 그곳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봉투를 여는 손끝이 떨려왔다. ‘글씨도 모르는 아버지가 과연 어떻게 글씨를 쓰셨을까?’
편지에는 글씨 대신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동그라미는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오직 딸 하나만을 위해 생선을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편지지를 펴놓고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가 그린 이 동그라미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우리 아버지를 향해, 내가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했던 아버지를 향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허리 편찮으신 건 좀 어떠세요’ 여기까지 써 내려가던 나는 그만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는 내가 싫어서 눈물이 났고, 딸이 보낸 이 편지를 아버지가 읽지 못하시는게 서러워 눈물이 났다.
주말을 이용해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방에 들어선 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며칠 전에 내가 보냈던 그 편지를 보았다. 편지 봉투는 열려져 있었다. 내 마음을 눈치 채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니 편지를 받았는디 읽을 수가 있어야재. 그래 내가 이장님한테 달려가서 읽어 달랬지 뭐... 참 근디 너도 내편지 잘 받았재?”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돌아서서 눈물을 닦아야 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근디 왜 안 묻냐? 그 동그라미가 뭔 뜻인지 니도 안기여?”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인심 좋은 웃음을 웃으시며 “몰랐구먼… 그건말여, 나는 잘 있응께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여. 그라고 너도 잘 있냐 뭐 이런뜻도 되고... 어떠냐? 내 머리가 좋제?” 아버지는 그렇게 웃고 계시는데, 내 눈에선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가끔 내게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는 물론이고 가끔은 세모도 그려져 있었고, 또 더러는 알지 못할 이상한 그림도 그려져 배달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그림문자로 편지를 보내주실 내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나던 그 정겨운 생선비린내도 이제 맡을 수가 없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보내주시던 그 편지가 내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는지를… 그리고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를…
아버지의 손 김정옥(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2동)
차 안에서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버지의 손’을 언제 잡아봤는지를 물어보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결혼식 전 아버지랑 신부 입장을 위해 연습하면서 한 번,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 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 손을 잡으면서 울었을 때 한번….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엄마 손처럼 자주 잡아주세요.
아버지의 수첩 백신지(부산시 영도구 신전동)
다들 잠든 밤늦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수첩을 집어 들었다. 생전에 항상 가지고 다니시던 수첩.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신 뒤 남은 유품 중 내 손에 와 있는 몇 가지 중 하나.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집안 경조사와 가족들의 생일 등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중 눈길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과외비란.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자식들 과외 시키느라 무척이나 힘드셨을 것이다. 친구 분들에게 과외비를 빌리러 다닌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다이어리 수첩이 6월로 넘어가니 메모가 띄엄띄엄 적혀 있었다. 뒤로 넘어갈수록 아무것도 없는 백지장. 더 쓰려고 해도 쓸 수 없었을 게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깐. 바쁘다는 핑계로 떠나가신 아버지 생각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내가 그 빈 수첩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마음도, 이제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도 모두 그 백지에 채워갈 것이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우리 딸 조은영(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저희 아버지는 10년 전쯤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그런데 쉬신 지 한달도 채 안 돼 경비직을 구하셨지요. 저를 비롯한 온 식구가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먹고살 만한데 일한다는 것도 마땅찮았고 제 딴에는 사실 조금 창피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가끔 재활용품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싫었고요.
그런데 얼마 전 6학년인 딸아이가 학교에서 직업에 관한 공부를 하다, 선생님께서 조부모님 중 직업을 가지신 분이 있느냐는 질문에 냉큼 손을 들고 “저희 할아버지는 경비로 일하세요. 연세가 칠십이 넘으셨는데도 열심히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전 저보다 훨씬 속이 깊고 훌륭하게 자라준 딸이 자랑스럽고,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됐답니다. 계속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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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지가 가신지도 벌써 이십육년이나 지나갔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차 한 잔 하자”하시며 현관에 들어서실 것 같다. 내 기억 속에는 이름난 시인으로서의 아버지보다 우리 가정 안에서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다. 나는 “어머니, 언제가 가장 기쁘셨어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병마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면서 “너의 아버지가 수술실 밖에서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계실 때였다”고 하셨다. 오십년 전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방안에 앉게 하고 일일이 껴안고 볼을 만지시고 “아버지 말 잘 듣고 있어”하고는 병원으로 가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목 근처를 가르는 생명을 건 어려운 수술이었다. 어머니는 이 수술로 평생 목둘레에 목걸이처럼 흉터가 있었다.
- ▲ 거실에서 아버지(오른쪽 박목월)와 함께. 성적표를 보지 않고 아들의 말을 믿던 선량한 마음의 아버지였다.
평상의 생활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수술로 여섯 시간이 흐른 후 겨우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수술실 유리창 밖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아버지가 서계신 모습이 첫눈에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로부터 또 몇 십 년이 지난 뒤까지 어머니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여섯 시간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수술실 밖에서 동동 발을 구르며 서있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자고 하지 않으셨다. 학기가 끝나 성적표를 어머니에게 내밀면 어머니는 아버지방으로 나를 데려 갔고 아버지는 딱 한마디 “잘했나”하고 물으셨다. 내가 “잘했어요”하고 대답하면 아버지는 “그래 더 잘해라”하셨고 “못했어요”하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쯤 나는 오히려 성적표를 내미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성적표보다 아들의 말을 믿으셨다.
너무 마음이 비단같아 얼마나 사시기에 힘이 드셨을까 이제야 겨우 알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힘들지”하고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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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시인 손택수
주말마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는 게 나는 죽기보다 싫었다. 어머니와 공범이 되는 것도 싫었고, 앙큼한 누이들에게 매번 꿀밤을 먹이면서 싸우는 것도 싫었다. 속으론 여섯 살, 여섯 살 하고 몇 번이나 되새겼는데 잔뜩 긴장한 목에서 내 의지와는 정반대로 저번처럼 갑자기 여덟 살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다른 애들처럼 내놓고 뛰어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하게 목욕탕 한 귀퉁이에 웅크려 앉아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온갖 찜부럭이 다 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아버지 탓이야.’ 급기야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따라다닐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뒤론 하릴없이 혼자서 목욕을 다녀야 했다. 여탕의 악몽에서 해방된 게 나는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런 행복감도 잠시뿐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끙끙거리며 밀 때마다 함께 와서 등을 밀어주는 부자(父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매번 등 밀어줄 사람을 탐색해야 하는 내 처지란 것이 생각하면 참 딱한 것이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지 않는 이상한 위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뭔 놈의 소설 시 나부랭이냐 이놈아, 늬 애비가 시장에서 지게질 하고 번 돈이 어떤 돈인데!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오셔서 하는 푸념을 나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술주정을 대놓고 저주하곤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건 일종의 직업병이라는 걸, 술힘을 빌리지 않곤 지게를 질 수 없을 만큼 당신이 노쇠했다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 ▲ 1998년 경남대 졸업식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는 등에 찍힌 지게 자국을 보여주기 싫어 아들과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로 아버지가 쓰러져 누웠을 때 나는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보았다. 40년 가까운 지게 짐에 화인처럼 찍힌 자국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자국이었고, 아들에겐 더군다나 어떤 식으로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관장을 하고 아버지가 아기 때의 내게 그랬듯 나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았다. 그리곤 아버지를 업고 병원 욕실을 찾았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적막한 등짝이 드러났다. 아버지,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이 지게 자국이 제겐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과 같아요.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등에 지고 온 삶의 무게들을 비로소 쓰다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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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동화작가 황선미
중학생이 되는 아들의 입학식에 갔다. 황사 바람이 부는 추운 운동장. 10시에 시작한다고 20분 전부터 애들을 줄 세우더니 10시20분이 지나도록 교장 선생님은 나오지 않았다. 중학교가 뭔지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은 열중쉬어, 차려를 반복하고, 파랗게 깎은 머리에 달랑 교복만 걸친 애들은 줄지어 선 채 시키는 대로 하는 살풍경. 문 앞까지만, 길 건너까지만, 철둑 너머까지만 하면서 따라나섰다가 운동장 한쪽에 서서 시린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벌을 섰다. 이가 딱딱 부딪치도록 추워본 게 참 오랜만이었다.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면서도 교실로 가서 자리에 앉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흐뭇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 때 체육대회 날. 반 대표로 배구를 하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그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뭇 사람들 속에서 나만 보고 있는 깊고도 특별한 눈길. 와글거리는 사람들에 가려져,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아버지는 환영 같았다. 멀리 있는데도, 슬쩍 보았을 뿐인데도 아버지가 마치 빙그레 웃고 있다고 느껴진 것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까. 입학식에도 졸업식에도 식구들이라곤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졸업식 날 학교 대신 시장을 쏘다니다가 집에 간 적도 있었는데. 하물며 가을 체육대회 정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오시다니.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당황했다. 서브를 제대로 할 수도, 공 한번 받아치기도 힘들 만큼 아버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너무 고지식해서 어렵고 두려웠던 아버지. 망해서 고향 떠난 뒤로는 한달에 한번쯤 집에 오는, 그나마도 밤차로 와서 이튿날 새벽차로 떠나버려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우물가에 수북한 기름빨래로나 확인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그날 점심 때 내게 다가와 모찌떡 세 개와 바나나 우유를 주셨다. 금방 가지도 않고 내 옆에서 내가 꾸역꾸역 떡 먹는 걸 지켜보셨다.
아버지가 너무 어려워 나는 “아버지도 좀 드세요” 소리도 못하고 혼자 그걸 다 먹었다. 도시락이라는 걸 싸본 적이 없었던 터라 목에 걸린 듯 뻐근하던 그때의 떡 맛을 나는 못 잊는다.
아버지가 중동 파견 노무자로 일하다 3년 만에 돌아온 직후였다. 농토를 빚에 넘기고 도시를 전전하며 날품을 팔다가 배운 용접기술. 그건 아버지에게 자부심이자 고통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용접 기술로 미군부대, 용산 비행장, 대우빌딩 등 배관공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다니다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다녀오는 동안 아버지는 용접에 관한 한 프로가 됐다. 아버지를 고용한 독일 사장이 아버지를 “코리아 넘버 원, 미스타 황”이라고 불렀다니까.
그러나 평생 못 벗어난 가난처럼 살 속까지 파고드는 불똥과 눈을 쑤시는 푸른 연기. 아버지가 아파했던 건 쇠를 녹인 불똥이 튀어 생긴 상처보다 푸른 연기에 쏘인 눈의 고통이었다. 아버지의 신음소리에 서늘한 밤을 보냈던 가족들.
아버지는 병상에서 내게 말했다. 언젠가는 리야드에 가보라고. 그곳 의과대학병원의 배관을 아버지가 용접했다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배관을 어찌 보겠나 하면서도 나는 언젠가 한번은 리야드 의과대학병원이라는 데를 가보고 싶어진다. 중학교도 못 간 딸이 안타까워서 편지 끄트머리에 ‘월급에서 5000원은 선미가 보고 싶은 책을 사보게 줘라’ 하고 쓰셨던 아버지.
엄마한테서 단 한번도 5000원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중학교에 못 보낸 걸 미안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딸이 고등학교에 가서 체육대회라는 걸 한다니까 아버지는 구두까지 닦아 신고 찾아와 주셨다. 배구공 하나 멋지게 넘기지도 못한 딸을 지켜봐 주시고, 먹을 걸 사서 말없이 주고 가셨다. 그 일이 두고두고 감사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가끔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중요한 자리에 가게 될 때는 더 주변을 살펴본다. 그림자처럼 내 뒤에, 뭇사람들 속에 아버지가 섞여 있을 것만 같아서. 시침 뚝 떼고 먼발치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돌아가신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는데도 그 버릇이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믿는다. 그래도 어떤 날에는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존재가 신호로라도 느껴졌으면 싶다. 너무 힘든 날이나 굉장히 기쁜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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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아버지의 추억'
탤런트 김혜자
아버지는 어느 여름날 낮잠을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칠십구세셨으니까 조금씩 몸이 안 좋으셨지만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김 박사는 죽음 복도 타고나셨다고 했지만 나는 식구들과 이별의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가시는 게 무슨 복이란 말인가, 그냥 서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나도 이제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가고 싶습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면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가 소파에 누우신 채 소변을 보신 적이 있습니다. 헝겊으로 된 소파가 흥건히 젖었습니다. 별로 편찮으시지도 않았는데 애기처럼. 나는 그때 “아버지 창피하게, 아줌마가 뭐라 그러겠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또 애기처럼 웃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멋있는 우리 아버지가 왜 이런 실수를 하셨을까? 어디가 안 좋으신가 걱정보다는 싫고 창피했던 기억이 갑자기 나는군요.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면서 울었던 생각도 납니다. 양복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버지의 몸은 너무 말라 있었습니다. 살갗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노인이셨습니다.
- ▲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1살)과 함께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어머니 모습에 내가 담겨 있다.
몹쓸 년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도 예뻐하셨는데. 삼십칠세에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양념딸” “내 양념딸” 하시며 나를 꼬옥, 꼬옥꼭 안아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십칠세에 결혼하시고, 두 살 위인 어머니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유학 길에 오르셨습니다. 일본으로 해서 미국으로, 그 세월이 십오년입니다. 그래서 제 언니와 제 나이 차가 십오년입니다.
아버지가 유학 떠나시던 날 층층시하 어른들 계신데 눈 한번 못 맞추고 어머니는 부엌문 앞에 서 계셨답니다. 아버지는 어른들께 전부 인사를 드리고 부엌 쪽으로 와서 고개숙인 어머니에게 “나 물 한 그릇 주시오” 했답니다. 어머니가 부끄럽고 당황해 냉수 한 그릇을 얼른 떠 아버지께 드렸답니다. 그때 얼핏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셨답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유 모를 슬픔에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는 물을 청하는 것으로 사랑의 표현을 청초한 아내에게 한 것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번 올려다보시는 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답하고, 그 순간의 사랑 표현으로 십오년을 사셨겠지요. 대갓집 며느리로 아침상을 열여덟 번씩 차려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에 밤이 되면 두 딸을 껴안고 파김치가 되어 잠드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안타까운 이별을 하셨겠지만 청춘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오년 동안 어머니만 생각하셨겠어요? 여자친구도 생기고 그러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 앨범에 보면 세련된 미국 여학생들과 찍은 사진도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시를 많이 읽어주셨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님의 침묵’입니다.
“혜자야 여기서 임은 누굴까?” 내가 초등학교 때일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렇게 대답하면 “응. 그것도 맞아. 그런데 꼭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야. 잃어버린 내 나라일 수도 있고 그래.” 나는 임이 나라란 말인가 생각하면서도 아버지의 이런 설명이 저를 키워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동물을 참 좋아하셔서 우리 집엔 거위, 원숭이, 오리, 개, 고양이 모두모두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개를 주워 오셨습니다. 삼발이 보셨어요. 다리 하나가 무릎 근처에서 없어진. 그 개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키웠습니다. 애꾸눈 고양이도 있었어요. 우리는 아주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내가 배우가 되는 것도 아주 좋아하셨지요. “좋은 배우가 돼라. 공부 많이 해서”, 그러셨습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 어느 고아원에 갔을 때 그곳 원장님이 “아버님이 사회부 차관으로 계실 때 우리 고아원을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이제 따님이 오셨군요” 하며 반기셨습니다. “정말 그 아버지에 그 딸입니다” 하시며. 아버지를 닮은 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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