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제

IMF 결과

좋은나라 2008. 9. 4. 16:32

IMF 구제금융사건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게 된 사태이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김영삼11월 10일 홍재형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 조차 모르고 있었다. IMF 경제 위기, IMF 외환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역사

  •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은 미쉘 캉드쉬가 김포국제공항에서 출국을 하던, 대통령은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서 IMF 구제금융을 수용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이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한국의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가 오후 7시40분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모두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IMF 시대가 종료되었다.

 일지

 원인

 외환 보유고 관리의 실패

당시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기업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외환보유고가 하락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가 초래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신용도가 하향조정되었고 원화가치의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연쇄적으로 국제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과도한 해외 단기차입금

당시 기업들의 과도한 해외 단기 차입금과 당시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의 잘못된 관치 중심의 경제 정책과 불합리한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 부실 기업이였던 한보기아자동차에 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으며 국제적으로 급박하게 움직이는 외환 관리에 실패하였다.

 환율 운용 정책 실패

1997년말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 투자기관들은 한국의 경제도 곧 어려워질거라 판단하여 투자자금을 대규모로 회수 해갔다. 또한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외환시장 불안정 속에서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기가 돌아오는 해외차입금의 규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대가 초래하기 직전 까지 몰리는 외환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채를 끌어와서 어음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외채를 끌어서 어음할인한 이들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한보와 기아의 12조원 가량의 대형 부도사태는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들은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관된 작은 관련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그리고 당시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에 의한 결과였다.

 IMF의 주요 영향

 정권 교체

IMF 사태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기존의 사회 관념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구제 금용 사태를 불러 일으킨 책임으로 사임했던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란 사건'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후보 이회창은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다.

 독점재벌의 해체

1997년 한해 동안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등 재벌 대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법정관리 체제로 넘어 가게 되었다. 특히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금융을 이용한 기업확장으로 인해 가진 부채가 환율 하락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65조가 되었고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또한 은행들의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 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는 등 국부의 유출이 심각하였다. 이는 재벌 기업들이 과잉 생산, 중복 투자, 차입 경영등 경영 실패와 분식회계, 족벌경영등의 고질적 부폐와 병폐에서 일어난 것이였다.

 해고규제 완화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었고 평생고용제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의 기업정책 변화

당시 김대중 정권은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하여 경기 부양에 성공하고 2000년, 한국은 IMF의 관리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이 소비 촉진 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내수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IMF 환란이 대기업 육성정책에 의한 일부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라는 분석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정부는 대기업 육성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벤처기업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시작하여 테헤란밸리를 중심으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국민의식 변화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아주 어려웠지만 전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일치·단결 하였으며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