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사건은 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게 된 사태이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김영삼은 11월 10일 홍재형 당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 조차 모르고 있었다. IMF 경제 위기, IMF 외환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를 초래 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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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1997년 11월 21일 김영삼은 미쉘 캉드쉬가 김포국제공항에서 출국을 하던, 대통령은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서 IMF 구제금융을 수용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이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한국의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가 오후 7시40분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모두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IMF 시대가 종료되었다.
일지
- 1997년 1월 23일 : 한보철강 부도
- 1997년 3 ~ 6월 :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대기업 연쇄 부도
- 1997년 7월 2일 : 타이 밧 화 폭락
- 1997년 7월 15일 : 기아 협조융자 신청, 사실상 부도
- 1997년 8월 14일 :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 1997년 9월 29일 :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0월 22일 : 쌍방울, 태일정밀 부도
- 1997년 10월 23일 : 홍콩 증시 폭락
- 1997년 10월 28일 : 주가지수 500선 붕괴,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우다. 주가 500선 붕괴
- 1997년 10월 30일 :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1월 1일 : 해태 부도
- 1997년 11월 4일 : 뉴코아 부도
- 1997년 11월 9일 : 정부가 종금사 달러를 지원 검토
- 1997년 11월 10일 : 김영삼 대통령, 외환위기 심각성 인지
- 1997년 11월 14일 : 강경식 부총리, 청와대 보고에서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설명. 김영삼 대통령, IMF로 갈 것을 지시.
- 1997년 11월 16일 : 미셸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
- 1997년 11월 19일 :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수석 경질
- 1997년 11월 19일 : 임창렬 부총리,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 IMF 언급 없음. IMF와의 이후 협상에 난행 요소가 됨.
- 1997년 11월 20일 : 1일 환율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됨, 그러나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됨
- 1997년 11월 21일 : 김영삼 대통령,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총재와 회담.
- 1997년 11월 21일 :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를 공식 신청 발표
- 1997년 11월 22일 :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를 신청 요청 발표
- 1997년 11월 23일 :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 실무협의단 1진 도착
- 1997년 11월 28일 : 임창렬 부총리, 일본 방문.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 들어갔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옴.
- 1997년 12월 3일 :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 대기성 차관 제공해 관한 양해각서 채결
- 1997년 12월 5일 : 한라그룹과 고려증권 부도, 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 1997년 12월 10일 :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중단, 기업어음(CP) 금리가 6일째 법정 상한선까지 치솟음,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법정 발행금리 상한선인 연 25%를 초과함.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됨.
- 1997년 12월 31일 :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 설립
- 1998년 1월 5일 : 노사정위원회 발족
- 1998년 1월 16일 : 단기외채 만기 연장을 위한 뉴욕협상 발표
- 1998년 1월 30일 :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 1998년 2월 3일 : S&P,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조정
- 1998년 2월 15일 :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 1998년 2월 19일 : BIS 8%미달 12개 은행 경영 개선 조치
- 1998년 3월 12일 : 단기외채 2백 18억달러 만기 연장
- 1998년 3월 24일 : 세계은행 1차 국조 조정차관 20억달러 승인
- 1998년 3월 26일 : 무디스,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 1998년 4월 1일 :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 1998년 4월 3일 : 외평채 40억달러 발행
- 1998년 4월 27일 :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 발표
- 1998년 5월 3일 : 외국인 투자업종개방 추가확대
- 1998년 5월 12일 : 거평그룹 부도
- 1998년 5월 14일 : 중기대출만기 연말까지 연장
- 1998년 5월 16일 :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 1998년 5월 20일 : 64조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 1998년 6월 18일 :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 1998년 6월 29일 :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퇴출은행, 조건부 승인은행 발표
- 1998년 6월 30일 : 금융경색완화대책 발표
- 1998년 7월 1일 :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 1998년 7월 3일 : 외환매입제한 폐지
- 1998년 7월 10일 :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 1998년 7월 11일 : 상업,한일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8월 12일 :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 1998년 8월 17일 :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 1998년 8월 19일 : 4개 보험사 영업정지
- 1998년 8월 25일 : 정부출연, 위탁기관 경영혁신 계획 발표
- 1998년 8월 28일 :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 1998년 9월 7일 : 재계,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9월 10일 : 하나, 보람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9월 11일 : 국민, 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9월 20일 :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 1998년 10월 19일 :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11월 5일 :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 1998년 12월 7일 :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 1999년 1월 1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 1999년 1월 25일 :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 1999년 2월 12일 : 미국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 1999년 4월 19일 :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 1999년 4월 21일 : 부실 5개 생보사(동아, 태평양,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 1999년 4월 23일 :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 1999년 6월 30일 :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 무산
- 1999년 8월 6일 :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 1999년 8월 12일 :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13일 시행)
- 1999년 8월 26일 :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 1999년 9월 17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TOI) 체결
- 1999년 10월 30일~12월 1일 :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 2000년 11월 3일 :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 자동차,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 2001년 8월 23일 : IMF 관리 체제 졸업(IMF 구제금융 195억달러 전액 상환)
원인
외환 보유고 관리의 실패
당시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기업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외환보유고가 하락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가 초래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신용도가 하향조정되었고 원화가치의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연쇄적으로 국제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과도한 해외 단기차입금
당시 기업들의 과도한 해외 단기 차입금과 당시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의 잘못된 관치 중심의 경제 정책과 불합리한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 부실 기업이였던 한보와 기아자동차에 대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으며 국제적으로 급박하게 움직이는 외환 관리에 실패하였다.
환율 운용 정책 실패
1997년말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 투자기관들은 한국의 경제도 곧 어려워질거라 판단하여 투자자금을 대규모로 회수 해갔다. 또한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외환시장 불안정 속에서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기가 돌아오는 해외차입금의 규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대가 초래하기 직전 까지 몰리는 외환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채를 끌어와서 어음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외채를 끌어서 어음할인한 이들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한보와 기아의 12조원 가량의 대형 부도사태는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들은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관된 작은 관련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그리고 당시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에 의한 결과였다.
IMF의 주요 영향
정권 교체
IMF 사태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기존의 사회 관념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구제 금용 사태를 불러 일으킨 책임으로 사임했던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란 사건'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후보 이회창은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다.
독점재벌의 해체
1997년 한해 동안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등 재벌 대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법정관리 체제로 넘어 가게 되었다. 특히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금융을 이용한 기업확장으로 인해 가진 부채가 환율 하락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65조가 되었고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또한 은행들의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 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는 등 국부의 유출이 심각하였다. 이는 재벌 기업들이 과잉 생산, 중복 투자, 차입 경영등 경영 실패와 분식회계, 족벌경영등의 고질적 부폐와 병폐에서 일어난 것이였다.
해고규제 완화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었고 평생고용제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의 기업정책 변화
당시 김대중 정권은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하여 경기 부양에 성공하고 2000년, 한국은 IMF의 관리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이 소비 촉진 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내수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IMF 환란이 대기업 육성정책에 의한 일부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라는 분석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정부는 대기업 육성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시작하여 테헤란밸리를 중심으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국민의식 변화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아주 어려웠지만 전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일치·단결 하였으며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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